소외를 내파(內波)하려는 이와 만나다
김현주(독립큐레이터)
구성하는 이
회화에 주력하는 작가 노재억은 타인이 보기에는 수고롭게, 자신에게는 의미롭게, 여러 물성을 화면에 얹어간다. 이번 오픈 스튜디오는 완료된 작품만이 오롯한 전시장이 아니라 그가 작업실에서 쌓으면서 깎고, 또 부딪히고, 긁고 긁히는 회화를 만들고 있음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였다. 호미달 스튜디오를 찾은 관객 그리고 반려 고양이 호미와 미달이가 이날의 목격자였다. 노재억의 작업실 이름은 호미와 미달이의 이름을 따서 호미달 스튜디오다. 그는 오픈 스튜디오에서 인위적인 건 하고 싶지 않다고 선명하게 의사 표현했다. 내 뜻도 다르지 않았다. 가장 그다운 모습으로 관객과 만나게 하고 싶었다. 그는 공간 분할 없는 네모진 작업실 안에 동선 따라 둘러볼 수 있도록 파트를 나누어 오픈 스튜디오를 준비했다. 드로잉 뭉치가 놓인 시작점, 평소 작업이 주로 벌어지는 작업대 주변, 바보 트리가 붙은 벽과 그가 남긴 메모들, 내손동 프로젝트 기록물과 영상이 놓인 파트 등 작업의 흐름을 유연하게 훑을 수 있도록 수고를 기울였다. 〈문자 그대로의 오픈 스튜디오〉가 이번 기획의 제목이었는데, 지난 몇 해를 돌아볼 때 여타 기관 레지던시의 오픈 스튜디오와 가장 흡사한 방식으로 관객을 맞았던 것 같다.
“드로잉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를 연결해 준다.” 무심히 붙인 듯한 여러 메모로부터 그가 고심하는 드로잉에 대해 짐작한다. 두툼한 파일로 철한 드로잉집에는 형상보다 태도가 배어 있었다. 그에게 드로잉은 밑그림이 아니다. 그림을 위한 기본 형상을 잡는 걸 드로잉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그에게 드로잉은 밑그림이기도 하다. 규격 없는 캔버스 천이나 지류에서 뻗어 나갈 작업 세계의 근간이다. 누군가에겐 이 드로잉이 흡사 폐지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축적으로부터 회화가 파생되어 나온다.
드로잉으로부터 단서를 확인한 후 벽에 걸리고 서로 기대 세워진 작품들을 일별했다. 대체로 올해 작업한 회화 위주다. 일견 조각적으로도 보이는 회화들은 마치 어디에선가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회화가 주로 캔버스 프레임 안에 임의의 예술 세계를 구현한다면 노재억에겐 그 프레임의 한정이 좁고 답답한 듯하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임의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은 그만의 작업 방식 때문이다.
그와의 만남이 즐거웠던 큰 이유는 유달리 포장이 없어서다. 91년생이면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작가 축에 든다. 작업 세계의 완숙이란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과업이라 해도 가야 할 길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작가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노재억은 많은 답변에 꾸밈없이 선선하다. 실패에 대해서도 담담하다. 크랙이 심하게 난 작품 앞에서 실패를 물었더니 지금으로선 그렇다 한다. 대신 답은 찾았다고 말했다. 작품의 완결을 부러 옹립하지 않고 즐겁게 이행을 선택하고 있었다. 모든 작품의 재료를 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 공업 재료를 두루 써보면서 회화의 전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화강암, 규조토 등 다양한 돌가루를 섞어 올리고 쌓고 굳히고서 다시 그걸 헤집고 깎고 긁어내는 등 못살게 군다. 물감, 붓으로 간소화되는 아틀리에의 정연함이 이곳에는 없다. 철물점에서 위치 이동한 듯한 온갖 도구들이 즐비하고 주워온 문짝, 틀이 언젠가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 노재억은 키가 꽤 큰 편인데 신체의 범위와 동세를 적극 활용해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흔히 쓰는 붓 대신 회화에 종종 이용하는 싸리비를 쥐어 들어 보일 때 그의 회화 제작 과정을 더 이해하게 됐다.
작품명이 〈무제(untitle)〉인 작업이 다수지만 종종 알쏭달쏭한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거대한 피부〉, 〈흰 틈〉, 〈휘파람 도둑〉 등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숙제를 던진다. 제목 작법의 이유가 있겠지만, 대응해서 묻지는 않았다. 일종의 시어나 노랫말 같은 압축과 은유가 있어 보인다. 채집과 재조합, 재가공이 그러하지 않은가. 30×30센티미터 사이즈가 연작으로 제작된 것이 많았지만 마치 30센티미터 자가 통용되는 도량형인 것처럼 가로 세로 30센티미터에 응축한 세계 지도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지도가 구체적인 도상 세계가 아니듯 지도를 길라잡이 삼아 짐작 가능한 세계를 떠올려 본다. 오픈 스튜디오 후 마침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에서 기획전 《나무가 숲에서 제 뿌리를 잃지 않는 법》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잠시 들린 전시장에서 세 개의 패널화 방식으로 구현된 〈땅으로부터〉(2022)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중간 패널은 하단 프레임을 한 뼘 노출시켜 그의 회화가 구성의 산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2022년 올해의 작품임에도 이 작품은 식약청 시약 창고였던 곳을 보존한 전시장의 낡은 선반과 잘 조응하고 있었다. 가쁜 호흡임에도 시의성을 간취하려는 의욕적인 시도보다는 더 오랜 숙고와 태도에서 오는 깊은 숨결에 가까운 작업으로 보인다.
서성이는 이
사실 노재억에 대해 널리 알려진 수식어는 내손동 작가다. 비록 지금은 안양시 관양동에 거주하지만 노재억은 내손동 작가로 활동한 시간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살던 내손동의 재개발을 경유하며 2018년 작가로서 주민들과 교류하고 2019년 수집된 사료와 역사에 대한 아카이브를 생활사전으로 묶어냈으며 2020년 이주 기간 동안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행정 구역 상의 내손동이라는 동네 자체보다 소외됨을 일상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로서의 태도가 그를 내손동 작가로 살게끔 이끌었다. 자신에게 공허함이나 허허로움은 일상에 가깝고 그 과정에서 소외가 작업 세계의 중심 어휘임을 밝혔다. 따라서 내손동 작가라는 수식과 그간의 활동은 분명 주목해야 할 이력이지만 오히려 더 그를 작가로 살게 이끄는 소외라는 주제가 작업에 어떻게 내려앉았는지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내손동 프로젝트의 기록물과 영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널리 레퍼런스들을 짚어보게 되었다.
그중에는 그가 써 내려간 편지가 눈에 띈다.
저는 1996년 처음으로 내손동에 이사 왔습니다. 제가 일곱 살 때입니다. 내손동 집은 어두컴컴한 짙은 갈색 빛이 깔린 볕이 잘 들지 않는 다소 침침한 느낌이 드는 집이었습니다. 지내다 보니 여러 장점들이 조금씩 보이더군요. 그리 넓지 않은 작은 텃밭에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고추와 상추, 쑥갓을 길렀고 어머니가 심어놓은 다양한 꽃들은 저에게 소중하고 포근한 정원이 되었습니다. 집이란 곳은 신기하게도 살면 살수록 살을 부대끼면 낄수록 정이 들며 제가 편하게 뛰어 놀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침침한 느낌이 드는 집에서 정 들고, 뛰어 놀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간 집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며 내 삶의 기억이 그러하듯 내손동을 떠날 이들에게도 살던 터에 대한 이야기를 청하는 편지는 담백했다. 텃밭을 가꾸시던 할머니가 남긴 편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맞춤법을 간간이 벗어나지만 속내는 따뜻했을 할머니의 필적을 따라 입 모양내며 따라 읽는 가운데 유달리 크게 쓰여 있는 ‘사랑’에 눈길이 갔다. 사실 『내손라주택재개발』을 아카이빙한 프로젝트에서 ‘개발’과 ‘사랑’은 이질적이다. 그러나 개발 지연이나 중단이 곧 사랑의 극대화를 의미하지 않음을 이젠 알 나이이기도 하다. 다만 전면에 놓이는 개발이 가리는 사랑, 흔적, 기억, 역사에 대해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허함이나 허허로움은 더 잘 보고 곱씹는 이에게 더 도드라진다. 노재억은 이렇게 서성이는 이다.
바보. 작업실 벽면에 크게 붙은 바보 트리는 가장 상단 바보에서 뻗어 나간다. 일상, 자유와 권리, 소외된 자, 공존이 바보로부터 갈래지어 나오고, 그 아래 촘촘히 가지를 치는 바보 트리 가운데 장애인, 자연, 터전, 기초생활수급자 독거노인, 빈곤 비즈니스, 폐지 경쟁, 쪽방촌 계급사회, 노동자 난민, 전태일, 세상의 눈에 동그라미가 쳐 있다. 한순간 써내려간 트리로 보이지 않는다. 옆집예술 오픈 스튜디오에서 노재억은 또렷하게 전태일에 대해 말했다. 그가 바보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었던 전태일을 소환한 순간, 그에게 새 눈이 뜨였다. 바보 트리의 저 아래 바보회로부터 위아래를 잇는 단어는 ‘벗’과 ‘시들지 않는 꿈’이다. 50여 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전태일 열사가 이 젊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와 질문을 던지는 걸까 내심 궁금하지만 바보 트리에 등장하는 모든 어휘가 작업으로 직접 도출되어 나오지 않듯이 촘촘하게 놓인 이 트리의 가지들이 맺은 결실을 성급히 분류하기란 부적절하겠다. 지금까지보다 앞으로를 기다리게 만드는 내공은 분명 그로부터 나온다.
나오며
그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미술대학 주변을 훑는다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한해 미술대학을 졸업하는 학생 수는 전국에서 대략 3,000명이 넘는다고 한다.2) 미술대학을 졸업하며 작가의 꿈을 접는 이들이 버리거나 남긴 캔버스를 수거해 와서 자신의 작업에 재이용하는 거다. 작가되기를 접는 이들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접힌 꿈을 대속해서 이어받는 이가 노재억이다. 작가되기는 쉬울 수 있어도 작가로 살아가기란 더욱 어렵다. 동기가 추상적이면 하루하루 버티기 어려운 것이 예술이다. 나는 바보 트리를 보며 그라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바보회의 위아래를 잇는 ‘벗’과 ‘시들지 않는 꿈’의 구체적 시작점이 바로 이 수거해 온 캔버스와 작업 재료들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내손동 프로젝트도 이어받은 꿈과 기억의 연장이었다. 대신 살아가는 이의 삶은 고단하다. 서성거림이 필수다. 남은 자들은 세상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다. 개발, 그 얼마나 세상의 속도를 함께 타야 하는 것일지. 하여 세상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나 편입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이 남아 정리하고, 다시 가다듬고 의미를 분별해낸다. 노재억만이 가는 길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노재억이 가는 길임은 ‘인정’한다. 비록 그의 모든 선택에 대해 예술적 의미를 불어넣지는 못하지만 그가 보고, 만나고, 감응하려는 세계를 어깨 너머에서 함께 보고 만나 감응해보려는 시도가 이 짧은 글이다.